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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acemakers | 김정호 | 2021-03-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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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 예배 말씀 공부와 나눔-138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 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12) 주제: 화평케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행복이 있습니다. 서론: 인류의 역사는 피로 물들어 있습니다. 기록된 4천의 역사 중 292년 정도만 전쟁이 없었다고 합니다. 20세기를 들어서며 사람들은 과학 기술의 발명으로 이 땅에 유토피아를 세울 수 있다고 꿈 꾸었습니다. 하지만 1차대전, 2차 대전을 치르며 그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치르며 남은 것은 신 냉전 시대였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나뉘는 두 진행은 냉전을 치르며 서로 으르렁 거렸습니다. 지금도 인종, 종교, 신분, 성별 등으로 나뉘어 평화를 기대하기 힘 든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평화를 외치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평화를 위하여 희생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었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호령하던 때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속국이 되어 메시아가 오시길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는 로마를 무찌르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는 말씀은 받아드리기 힘 든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선민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무력으로 해방될 것을 믿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행복하다는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처럼 받아드리기 힘든 말씀 이였던 것입니다. 세상이든 종교이든 힘있고 돈 있는 강한 자가 행복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아 실현, 자기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세상의 가치에 반하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자기의 죄를 애통해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겸손하고 온유한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입니다. 그는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돕는 자입니다.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희생을 감내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자가 진정으로 예수를 닮고 행복한 인격자입니다. 힘으로 이겨서 승리하는 것을 숭배하는 세상에서 화평을 꿈꾸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에 화목이 없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부부가, 부모와 자녀가, 자녀들 끼리, 혹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에 화평이 결여되어 있기에 갈등과 싸움이 끝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권리와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 끼리 어떻게 싸움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행복이 있다.” 오늘은 이러한 점을 살펴 보려 합니다. 1. 배울 내용 첫째,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화평케 하는 자는 그러한 기질을 타고난 자가 아닙니다. 그는 구원 받은 자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화평케 하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먼저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기에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은 죄와 죄인들을 향하여 진노하십니다. 죠나단 에드워즈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회심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공격할 수 있다면 죽이려 할 것입니다. 인간은 죄악스럽게 하나님의 원수이며 하나님은 의롭게 인간의 원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그를 대적하여 원수가 된 죄인들을 위하여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들의 죄값을 지불하시고 그의 완전한 의로움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0-22).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고후 5:18). 하나님과 진정으로 화목케 되는 은혜를 경험한 자는 자신과 이웃과 화목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되지 못한 자는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평화는 참 소중합니다. 콜롬비아 원주민에게 선교하며 신약을 그들의 말로 번역하려던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화”란 단어를 그들 언어에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부족 추장에게 비행기를 태워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추장은 3일 동안 밀림을 걸어서 가야 할 길을 비행기로 20분이면 갈 수 있기에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기다려도 오지 않자 추장은 밀림으로 그냥 떠나 버렸습니다. 얼마후에 비행기가 도착하고 추장을 부르러 다른 사람이 그 뒤를 쫓아가 다시 데려왔지만 추장이 돌아올 때에는 이미 비행기는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추장은 분노하며 “내게 한 마음이 없습니다”(I don’t have one heart”)라고 선교사에게 말했습니다. 선교사는 “한 마음을 가진다”라는 뜻이 무엇인지를 부족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두 당사자 사이에 아무 것도 방해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찾던 단어가 바로 그것이 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가르는 죄, 정죄, 죄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화목케 하는 자는 이것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인 것을 압니다. 우리는 화목케 하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둘째, 화평케 하는 자는 새 사람의 관점에서 행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평화주의자라고 말하길 좋아합니다. 평화주의자를 인격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상 평화를 이루려면 용기, 지혜, 희생이 필요합니다. 말로만 평화를 주장한다고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의 평안을 위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침묵합니다. 이편도 저편도 들지 않으며 모두의 마음에 들려 하지만 누구의 편도 되지 않습니다. 결국 문제에 대하여는 침묵하기에 두 사람을 화목케 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평판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용서치 않고 원수 갚으려는 마음, 이기적인 마음, 화목보단 반목을 통해서라도 이기려는 마음 등이 문제입니다.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 역사가 이러한 인간의 죄성을 잘 증명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화목한 자는 화평케 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은 새로운 관점, 곧 예수님의 관점을 가진 자입니다. 옛 사람은 마음의 죄성을 따라 행합니다. 하지만 새 사람은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따라 화평케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의 힘 논리로는 부족합니다. 힘으로 상대를 누르고 겉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상대는 권력에 눌려 평화하는 것이지 마음으로부터 화목한 것은 아닙니다. 상대는 더 큰 힘을 길러 다른 상대를 누르고 자유하려 합니다. 힘과 사랑은 함께 가야 합니다. 힘이 있지만 사랑하기에 상대를 섬겨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사람의 관점입니다. 새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새 관점으로 행하는 자입니다. 자기 부인은 예수님이 그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명하신 말씀입니다. 자기 권리, 자기 주장, 자기 이익, 자기 확대의 관점은 화평케 하는 자의 관점과는 다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예수님을 본 받으려 합니다. 그분이 자기를 부인하고 그 백성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화목 제물로 드리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 본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애씁니다. 자기 부인과 이웃 사랑은 직결되어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기는 자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이기적으로 행하기에 평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웃과 화목하려면 자기를 부인하며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관점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자기 명성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합니다(고전 10:31). 이것이 바로 새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싸움과 분열로 평화를 찾기 힘든 세상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는 외치지만 평화를 이루려 용기, 타협, 희생은 없습니다. 고통스런 세상에서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 비참한 삶에서 우리의 모든 평화는 고통이 없을 때 보단 그것을 겸손히 견딜 때 얻는 것입니다. 고통을 견디는 법을 잘 아는 자는 더 큰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정복자이고, 세상을 다스리는 자요, 예수님의 친구이며, 천국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수님을 닮는 친구들이어야 합니다. 셋째, 화평케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이와 화목하려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고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자들을 용서하기가 힘듭니다.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준 자들을 평생 용서치 않고 원수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배하다가 형제에게 잘못한 것이 생각나면 가서 화해하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는 말씀입니다. 원하는 자하고만 화평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하고 화평하라고 말씀합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은 함께 합니다. 이웃과의 화평 없이는 거룩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웃과 화평치 않으면 삶은 불행해 집니다. 오늘날 많은 영적, 육신적 질병은 깨진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기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화평케 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에 모든 이로 화평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점을 깨닫지 못하고 불순종하며 불행해 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화평을 목적으로 추구하고 화평을 만들어야 합니다. 주석가 리안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자는 단순히 평화 유지자가 아니라 평화 제조자입니다. 적대적 대립을 끝내고 싸우는 자로 화목케 하는 것입니다. 알가일은 이들은 타협자들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악을 선으로 이기는 자들입니다.” 악을 선으로 이기려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와 선하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삭은 그 이웃과 우물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다투지 않고 자기 권리를 포기하며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재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비멜렉 왕은 그에게 와서 평화 조약을 맺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이삭이 하나님께 복 받은 자인 것을 알고 그 화평을 원하였습니다(창 26:22-29). 이삭의 삶은 잠언서 16:7 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룬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화평케 하는 자는 상대를 품고 인내하며 희생을 감내해야 합니다. 화평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화평케 하려고 작정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두 제자가 어느 날 철학 토론을 하다가 크게 다투었습니다. 서로 의견이 달라서 다투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는 그것으로 인해 갈라질 필요가 없다 생각하여 먼저 다른 친구에게 가서 화해를 요청하였습니다. 다른 친구도 이를 받아 드려 화목해 졌습니다. 그 때 이 친구는 “네가 진정 큰 인격자”라 칭찬을 하며 “싸움은 내가 시작했는데 화평은 네가 시작하였다”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도 화평하려 했다면 예수의 제자인 우리들은 더욱 더 화평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는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 받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4:33).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목케 하는 직책을 받았습니다.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대표하여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화평케 함을 볼 때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마 5:16). “아들”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당시 문화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대를 잇고 재산을 상속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단어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케 되어 화평케 하는 자들이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로 칭함을 받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를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은 구약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8).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칭함을 받는 것은 엄청난 특권과 책임과 축복입니다. 자녀의 신분은 아버지의 신분에 따라 결정됩니다. 아버지의 실력은 자녀에게 큰 힘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입니다. 그의 사랑은 끝이 없고 그의 행사는 놀랍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의 아버지가 바로 이런 분입니다. 그는 그 아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그분과 화목케 하시고 화목케 하는 직책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 된 책임입니다. 아버지를 대표해서 이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그 자녀를 사랑하시고 지키시며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세상의 부모는 그 자녀를 혹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자녀를 영원히 잊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정치 고관이나 유명 연예인 혹은 기업인의 자녀는 온갖 특혜를 누립니다. 사람들은 부모 잘 만나서 그렇다고 비웃기도 하고 부러움을 드러냅니다. 비록 우리는 그런 계층의 부모가 없다 해도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비행으로 부모를 욕되게 하는 정치, 기업인의 자녀와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복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행복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진정으로 행복한 자입니다. 토마스 아케핌스는 다시 말합니다: “먼저 자신과 화평하세요. 그러면 다른 이들에게도 평화를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 화평한 자는 학식이 있는 자보다 더 많은 선을 행합니다. 정욕적인 자는 선을 악이 되게 하고 악을 믿는데 빠르지만 화평한 자는 선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선이 되게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세상을 더 낫게 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화평케 하는 직책을 잘 수행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나눔과 적용의 내용 a. 하나님께 감사할 내용을 나누어 보세요. 한 주간 예수님과 어떤 사귐 가운데 살았는지 나누어 보세요. b.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습니까? 하나님과의 적대적 관계를 끝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십니까? 하나님과 화목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시려 노력합니까?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왜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구원을 먼저 받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c. 여러분이 사는 세상, 국가, 사회, 교회, 가정에서 평화를 경험하십니까 아니면 다툼을 경험하십니까? 왜 화평케 하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화평케 하려면 세상과 다른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웃을 눌러야 할 경쟁자로 보십니까 아니면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할 동반자로 보십니까? 이웃에 대한 어떤 관점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 여러분 안에 있는 무엇이 이웃과 화해하려는 것을 막고 있습니까? 이웃의 어떤 면 때문에 화목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럼에도 이웃과 화해하려고 시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과 화평하려고 마음을 결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d. 여러분은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닮는 다는 말에 동의하십니까? 반목이 있는 곳에 화목을 주려 노력해 보신 적이 있으면 함께 나누어 보세요.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행복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 프란시스의 기도를 따라 기도해 보세요: “주여, 나를 주님 평화의 도구로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는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는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는 신뢰를, 절망이 있는 곳에는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는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는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주여, 위로 받기 보단 위로하고, 이해 받기 보단 이해하며, 사랑 받기 보단 사랑하게 하소서. 이는 주므로 받으며, 용서하므로 용서 받으며, 죽으므로 영생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멘.” 2. 기도할 내용 a.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회복하도록 기도해 주세요. 기도하고 전도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 주세요.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로 이끌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목장 모임이 부흥하도록 기도해 주세요. b.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과 고국의 평안과 바른 통치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c. 교회의 젊은이들이 미래의 지도자로 훈련되고 세워지도록 기도해 주세요. d. 코로나바이러스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교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e. 교회의 영적, 재정적 필요를 채워 주시도록 기도해 주세요. f. 교회에 함께 일할 수 있는 동역자들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해 주세요. g. 성경번역 박혜리 선교사님, 터키의 소방은 선교사님(은석이 아버지), 필리핀의 김일로 선교사님(예능이 아버지), 라오스의 이 영상선교사님(신혜 아버지)을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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