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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Merciful | 김정호 | 2021-03-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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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 예배 말씀 공부와 나눔-13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 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12) 주제: 우리의 긍휼은 하나님의 긍휼을 더욱 누리게 합니다. 서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미 소는 그 죽음을 직감하며 아기 소에게 끝까지 젖을 먹입니다. 불과 몇 분 후면 죽게 되지만 본능적으로 아기를 긍휼히 여기며 어미의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비록 짐승이기 하지만 각박한 현실에서 자기 만을 위하여 사는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됩니다. 요즘 어떤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을 버리고 떠나갑니다. 어떤 양부모는 입양한 아이들에게 온갖 학대와 폭력을 행사하여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들은 금수 만도 못합니다. 자신들의 행복을 위하여 자녀들을 버리고 죽게 하는 행동은 공분을 삽니다. 이들은 자기의 행복이 중요하듯 자녀의 행복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자들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사람 됨됨이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양심의 평화가 곧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사는 자가 참으로 행복하다고 예수님은 말합니다. 자기 만을 위하여 살며 이웃의 고통에 눈을 감고 이웃의 신음에 귀를 막는 자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전 세대보다 훨씬 심령이 메마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자기의 아픔 때문에는 울지만 이웃의 아픔 때문에는 울지 않습니다. 자아 실현을 통하여 행복을 이루려는 노력이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에게 집중하면 할수록 행복은 더 멀리 달아납니다. 자살 충동,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 등은 자기에게 함몰된 예민한 자아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관심을 자기에게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돌리라고 하십니다. 자기 연민 대신 이웃에 대한 참된 긍휼이 행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긍휼히 여기는 행복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긍휼은 하나님의 긍휼을 더욱 누리게 합니다. 오늘은 이러한 주제를 살펴 보려 합니다. 1. 배울 내용 첫째, 긍휼은 공감의 마음의 돕는 손입니다. 긍휼을 뜻하는 신약의 단어들을 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이크티르모스”는 이웃의 비참함을 보면서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스프라그크니조”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연민, 불쌍히 여김을 뜻합니다. 구약에서는 “라훔”이 동의어입니다. 이는 여인의 가장 깊은 곳, 곧 자궁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긍휼입니다. 잉태되었던 곳에서 나온 갓난아기를 향한 엄마의 긍휼입니다. “엘레에오”(동사) 혹은 “엘레에몬”(형용사)는 이러한 모든 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그 비참함, 고통을 덜기 위하여 취하는 행동을 포함합니다. 바로의 딸이 나일 강에서 아기 모세가 우는 것을 보고 긍휼히 여긴 것과 같습니다. 그녀는 히브리인의 남자 아기를 죽이는 것이 그 아버지 바로의 뜻임을 압니다. 하지만 그녀는 모세를 긍휼히 여기고 그녀의 양자로 삼아 양육합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여리고로 내려 가는 길에 강도 만난 자를 도운 사마리아인도 긍휼을 실천합니다. 유대 종교를 대표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을 선별적으로 적용하여 율법의 정신을 어깁니다. 제사법을 따라 자신들을 의식적으로 더럽히지 않으려 강도 만나서 죽을 지경에 있는 자를 외면합니다. 하지만 율법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말씀은 버리고 제사의 정결법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마음안에 긍휼히 여김이 없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마음의 소유자들입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 말에 태워 주막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 맡기며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와서 갚아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덜기 위하여 도움을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고통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고통에 잠겨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공감하며 돕는 긍휼이 참된 행복입니다. 둘째, 우리의 긍휼은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이웃의 어려움을 도우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성품의 소유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긍휼을 행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제할 때 사람들 앞에서 나팔을 불며 자신들의 선함을 광고하였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이 이웃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라기 보단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고통을 공감하며 도우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긍휼은 구원의 열매, 곧 성령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결과로 고통 받는 백성들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하늘 보좌에서 구경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 가운데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병든 자들을 치유하시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시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죄의 결과로 비참한 가운데 사는 백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고통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러한 긍휼을 경험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압니다. 죄인으로 지옥의 심판 외에는 받을 만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아 주신 것입니다. 이 보다 큰 은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4-5). 은혜는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호의, 사랑입니다. 긍휼은 죄의 결과로 비참함 가운데 있는 죄인들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며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눈물, 아픔,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이것이 그의 긍휼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긍휼히 여긴다면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학자요 목회자인 씬클레어 퍼거슨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은 그리스도께 참으로 회심한 것을 보여주는 시금석이며 보증입니다.” 우리의 긍휼은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증거, 곧 구원의 증거입니다. 긍휼히 여김은 옵션이 아니라 신자의 마땅한 인격입니다. 셋째, 우리의 긍휼은 고통 당하는 자의 필요를 채우므로 증명됩니다. 우리의 행복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빗어집니다. 이익이 되는 이웃 만을 새기려 한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궁핍한 이웃을 돕는 의미 있는 일을 할 때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신발을 신어 보며 그들의 처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정서적, 물질적, 관계적, 혹은 영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하는 모든 마음, 기도, 행동은 모두 긍휼입니다. 하지만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며 그 필요를 채우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약 3:17-18). 주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욱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행 20:35). 가난한 이웃에게 베푼 것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풍성해집니다. 청교도 설교자 토마스 왓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자의 구걸하는 손은 예수님의 금고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이기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집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게을러서 저렇게 된 것이야 라고 생각하며 그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하여 생각합니다. 하지만 긍휼이 여기는 자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자로 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인과 자신을 동일시 한 것처럼 고통 하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 합니다. 누군가를 도우려 하는데 그에게 냄새가 나고 더러워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끔직한 죄악입니다. 자격이 없음에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마음을 막는 것은 긍휼의 인격이 아닙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마음에 상처받는 자들, 물질이 없어 고통하는 자들,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방황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처럼 느끼고 도우려 합니다. 또한 자기에게 죄를 범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용서합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자가 왕에게 탕감을 받은 사실을 잊고 백 데나리온을 빚진 친구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처럼 행하지 않습니다. 그는 용서를 통하여 죄를 지은 자의 양심을 자유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자신도 더욱 큰 자유를 누리며 행복해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은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할 수 있음을 믿고 복음을 전합니다. ‘저런 죄인은 하나님도 어쩌실 수 없고 구원하실 수 없을 것이야’ 라고 생각치 않습니다. 모든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러한 성품의 소유자는 행복합니다. 넷째, 우리의 긍휼은 하나님의 긍휼을 더욱 경험케 합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긍휼히 여겼기 때문에 그 공로로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만한 자격이 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매일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 긍휼의 증거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22 The steadfast love of the LORD never ceases; his mercies never come to an end;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your faithfulness (애 3:22-23).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고난 중에 있는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 큰 하나님의 긍휼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한 주석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소원은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본을 따를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증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긍휼을 의지하여 매일을 살아 가는 복을 받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루라도 죄를 짓지 않고 사는 날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 말, 행동으로 죄를 범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매일 의지하여 회개하며 용서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은 죄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이웃을 쉽게 정죄합니다. 정죄하는 마음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의 반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존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임을 기억할 때 고통 받는 자, 가난한 자들,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쉽게 정죄하지 않고 동질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죄로 인해 고통하는 자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덜기 위하여 도움의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살듯이 그들도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긍휼을 베풀어서 그들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보며 하나님의 부요하신 긍휼을 경험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됩니다. 우리가 베푸는 긍휼은 하나님의 긍휼에 비하면 사실상 미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다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실 무한하신 긍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유 1:21).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하나님의 크신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우리로 주님을 영원히 즐거워 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한 자들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2. 나눔과 적용의 내용 a. 하나님께 감사할 내용을 나누어 보세요. 한 주간 예수님과 어떤 사귐 가운데 살았는지 나누어 보세요. b. 여러분은 긍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긍휼이 어떤 것인지 정의해 보세요. 마음 뿐이고 말 뿐인 긍휼과 행동이 뒤따르는 긍휼이 어떻게 다른지 나누어 보세요. c. 여러분이 어려운 자를 긍휼히 여기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긍휼을 베풀 때 자기의 선과 의를 인정 받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까? 타고난 성품이 긍휼이 여기는 자와 중생을 통하여 긍휼히 여기는 자는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긍휼은 어디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긍휼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이 경험이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데 어떤 역할을 합니까? d. 여러분이 구체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궁핍한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려는 마음을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 교만, 이기심, 우월감 때문에 어려운 이웃을 멀리하고 정죄하며 도움을 베풀지 않은 적은 없습니까? 이러한 마음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지 않으시는지 생각하며 회개해 보세요. 여러분이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었을 때 마음에 무엇을 느껴 보셨습니까? 그 이웃이 여러분에게 감사했을 때 느낀 보람은 어떤 것이며 이를 통하여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리셨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매일 하나님의 긍휼을 어떻게 경험하며 살고 있는지 묵상해 보세요. 3. 기도할 내용 a.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회복하도록 기도해 주세요. 기도하고 전도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 주세요.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로 이끌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목장 모임이 부흥하도록 기도해 주세요. b.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과 고국의 평안과 바른 통치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c. 교회의 젊은이들이 미래의 지도자로 훈련되고 세워지도록 기도해 주세요. d. 코로나바이러스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교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e. 교회의 영적, 재정적 필요를 채워 주시도록 기도해 주세요. f. 교회에 함께 일할 수 있는 동역자들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해 주세요. g. 성경번역 박혜리 선교사님, 터키의 소방은 선교사님(은석이 아버지), 필리핀의 김일로 선교사님(예능이 아버지), 라오스의 이 영상선교사님(신혜 아버지)을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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