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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iritual Mourning | 김정호 | 2021-02-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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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 예배 말씀 공부와 나눔-133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 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12) 주제: 죄와 그 결과에 대한 애통은 우리에게 행복한 위로의 복을 가져다 줍니다.
서론: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슬퍼합니다.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슬픔의 정도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소중하게 여기는 그릇이 깨졌을 때와 소중하게 여기는 집이 불타 없어졌을 때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자를 사고나 질병에 잃었을 때 느끼는 슬픔을 말로 이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때는 오열하고 통곡하며 슬픔을 나타냅니다. 울음이 슬픔을 다루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슬픔을 피하려 합니다. 늘 기뻐하려 합니다. 슬픔을 잊고 행복하려 분주합니다. 하지만 슬픔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우리 정서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상실했을 때 슬픔은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다릅니다. 신자들은 순수함, 정직함, 의로움, 거룩함을 귀하게 여기고 그런 것들을 잃어버릴 때 슬퍼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도덕적 가치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잃고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아서 행복을 추구하며 삽니다. 왜 행복하지 않은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슬퍼 우는 것은 불행한 것이고 기뻐 웃는 것은 행복이라 단순하게 정의합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자들에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말하는 애통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이가 죽은 것으로 인해 애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슬퍼하고 애통할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하는 애통은 영적인 애통입니다. John Stott는 영적 애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문맥에서 볼 때 위로를 약속 받은 자들은 주로 사랑하는 잃고 애통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순수함, 의로움, 자존감을 잃고 애통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사별의 슬픔이 아니라 회개의 슬픔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 애통의 행복입니다. 오늘은 죄와 그 결과에 대한 애통이 우리에게 행복한 위로를 준다는 말씀을 살펴 보려 합니다. 1. 배울 내용 첫째, 영적 애통은 죄와 고통에 대한 애통입니다. 죄는 파괴적입니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죄를 가볍게 여깁니다. 죄를 실수 정도로 이해합니다. 누구나 다 하는 것이기에 죄를 정당화합니다. 요즘은 간통죄가 죄가 아니며 동성애도 죄가 아니라 합니다. 개인의 자유요 인권이며 선택이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그의 말씀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죄, 교회의 죄, 사회의 죄, 세상의 죄를 대수롭지 않기 여기기에 죄를 슬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부정하고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자유로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고는 행복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악인에게 평강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렇기에 죄를 애통하는 자들은 참된 행복을 맛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후 그의 말씀을 기억하며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회복으로 이끄는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자기 죄 뿐만 아니라 가정, 사회의 죄를 애통하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는 가볍게 여기지만 이웃의 죄는 심각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이웃이 죄로 넘어지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의 실족으로 우리의 의로움이 더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패한 마음의 실체를 대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의 부패를 대면한 자는 심령이 가난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가장 큰 죄인으로 여깁니다. 세상의 가장 악한 자보다 자신을 더 큰 죄인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아무런 선이 없으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으로 간주합니다. 마음을 찢고 애통해 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남들의 죄를 보며 절대로 기뻐하거나 우쭐해 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마음 아파 웁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배신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망해 가는 그 백성을 보며 통곡하였습니다.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그를 거부하는 예루살렘을 보며 우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지도자들의 도덕적 부패로 비난이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도 교회를 너무도 싶게 비판하고 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죄를 자신의 죄로 품고 기도하며 애통하는 자는 찾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에스라처럼 민족의 죄를 품고 애통하며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죄 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인 고통, 비참함을 애통하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자신의 죄의 결과로 고통을 겪는 자들이 많습니다. 또한 누군가의 죄로 인하여 고통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사회의 악으로 부터 고통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세상에는 고통, 고난이 끝이 없습니다. 인신매매, 현대판 노예, 아동 성매매, 착취, 정치적 부패, 횡령, 전쟁, 전염병 등의 피해로 고통하는 자들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울고 아파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합니다(롬 12:15). 예수님은 죄로 고통하는 자들의 고통을 긍휼히 여기시고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함께 마음 아파하는 애통이 필요합니다. 둘째, 영적 애통은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죄와 그 결과를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그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며 하나님께로 돌이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 회개입니다. 죄와 고통을 애통해 하는 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행한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그렇게 행하는 자들의 죄를 애통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반항하며 가출한 자녀를 부모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의 죄와 그로 인한 고통을 슬퍼하며 웁니다. 믿는 부모는 그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품고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이는 자녀를 사랑함에서 그들의 죄와 고통을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 자는 자기들의 죄를 슬퍼하며 부모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반면에 말도 안 듣고 말썽만 부리는 자녀가 가출해서 속이 시원하고 행복하게 느끼는 부모가 있다면 이들은 자녀를 사랑하기 보단 자신들의 안위를 더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가출한 자녀들이 이를 안다면 더욱 죄를 지으며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행한 것을 슬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그에게로 돌이킵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회개 뿐만 아니라 이웃의 고통을 애통해 하는 자들은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보면서도 외면하거나 웃어 넘긴다면 이는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의 눈물은 그 대상을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레미야의 눈물도 그 백성을 향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눈물도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입니다. 교회 안에서 애통이 사라지고 축제 분위기의 예배만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 영광이 아닌 자기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죄와 고통을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행복합니다. 셋째, 영적 애통은 평생 지속됩니다. 영적 애통은 단회적이 아닙니다. 혹자들은 회심할 때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기에 더이상 애통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구원파 이단이 이런 주장을 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완전히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의로운 자는 더 이상 회개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회개하면 완전히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였기에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는 궤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본문에서 “펜쎄오”라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지속적인 행동을 뜻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현재적으로 평생 지속되어야 합니다. 과거에 믿었는데 지금은 믿지 않는다면 과거에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회개 했는데 지금을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하면 자신의 죄악된 현실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회개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회개는 우리가 매일 하는 신앙의 의무요 특권입니다. 회개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은혜입니다. 회개와 애통은 구원 받은 자의 표식입니다. 영적 거인인 사도 바울도 자기 내면 안에 죄가 거하는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행치 않고 원치 않는 것을 행하는 갈등을 겪으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롬 7:24). 회개의 애통은 영적 성숙의 표지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며 성숙한 자는 작은 죄에도 슬퍼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실체를 보며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철저하게 느끼며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슴을 찢으며 가장 사랑하는 자를 잃은 것처럼 애통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애통을 요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애통하는 야곱에게서 발견합니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창 37:34-35). 영적으로 애통하는 자는 슬픔을 거짓으로 만들어 내거나 슬픈 척 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척 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애통은 온 영혼의 애통이었습니다. 죄와 고통에 대한 영적 애통은 이러한 애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평생 죄와 고통을 대면하여 싸우며 그에 대한 애통을 실천합니다. 넷째, 영적 애통은 하나님의 위로를 가져다 줍니다. 애통 자체가 행복은 아닙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애통하는 자의 영혼에겐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말은 깊이 영혼을 만져주지 못합니다. 초상집에 가서 위로한다고 하는 말들, “더 좋은 것으로 갔으니 슬퍼하지 말아”,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니 괜찮아”, “천국에서 고통없이 지낼 것이니 기뻐해야지” 등등은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죄와 고통을 애통해 하는 자들에게 “너무 극성맞게 믿지 마. 적당히 믿어야지”라고 충고하며 위로하여 합니다. 이들의 말은 가슴에 깊이 꽂히는 칼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하는 영혼의 아픔을 치유해 줍니다. 그것은 먼저 죄 용서입니다. 다윗은 이 용서의 복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용서와 함께 눌린 양심이 자유하고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고 슬픔의 재 대신 기쁨의 화관을 씌어 주십니다(사 61:1-3). 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위로의 기쁨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자들에게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네가 아무리 그래도 절대 안돼”라고 매정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들을 용서해 주십니다. 이 용서의 은총은 지옥의 형벌을 없애고 천국의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자기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죽음으로만 그 죄값을 갚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는 기쁨, 자유, 평안, 행복입니다. 자기가 사형을 당해야 하는데 누군가 대신 죽어서 살아났다면 그 사람은 결코 자신을 위해 죽어준 사람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너무 가볍게 취급하고 당연시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심각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려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셔야 했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우리 때문에 죽으신 것을 깊이 깨달을 때 죄의 심각성을 깨닫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습니다. 구원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음에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십자가 죽음에 내어주신 사랑을 맛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천국을 열어 주셨습니다. 장차 우리는 그 나라에 갈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영적으로 애통하는 자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합니다.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들이 누릴 행복입니다. 2. 나눔과 적용의 내용 a. 하나님께 감사할 내용을 나누어 보세요. 한 주간 예수님과 어떤 사귐 가운데 살았는지 나누어 보세요. b. 여러분은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며 다루십니까? 자신의 죄를 가장 사랑하는 자를 잃은 것처럼 슬퍼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교회의 죄를 그렇게 애통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왜 애통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세요. c. 이웃의 고통을 공감하며 슬퍼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죄가 관영한 세상을 볼 때 손가락질 하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죄를 슬퍼하는 것이 쉽습니까? 죄에 고통을 대하는 여러분 마음 상태는 어떤지 돌아보며 기도해 보세요. d. 밤새 폭풍이 지나가고 맑게 개인 아침 하늘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마치 그때처럼 죄와 고통으로 인해 폭풍 눈물을 흘린 후에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 보세요. 회개를 통해서 용서의 기쁨, 천국의 위로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언제 가슴을 치고 마음을 찢으며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셨습니까? 영적 애통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살펴보고 제거하도록 기도해 보세요. 3. 기도할 내용 a.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회복하도록 기도해 주세요. 기도하고 전도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 주세요.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로 이끌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목장 모임이 부흥하도록 기도해 주세요. b.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과 고국의 평안과 바른 통치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c. 교회의 젊은이들이 미래의 지도자로 훈련되고 세워지도록 기도해 주세요. d. 코로나바이러스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교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e. 교회의 영적, 재정적 필요를 채워 주시도록 기도해 주세요. f. 교회에 함께 일할 수 있는 동역자들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해 주세요. g. 성경번역 박혜리 선교사님, 터키의 소방은 선교사님(은석이 아버지), 필리핀의 김일로 선교사님(예능이 아버지), 라오스의 이 영상선교사님(신혜 아버지)을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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