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12/29/2024 | 김혁 | 2025-01-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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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2:22-38절 개역개정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누가복음 2:22-38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우리는 지난 주 성탄절을 보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와 헤롯 대왕의 권력 앞에서 한 없이 약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진정한 왕이신 분이 예수님 이십니다.
지금은 주님을 안고 찬양하지만 앞으로는 주님의 품에 안겨서 찬송하게 되겠죠!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은 아이가 태어 난 지
8일 후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요셉은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예수님을 안고 찬송하는 두 사람을 성경에서 읽습니다.
두 사람은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들에게서 우리들의 믿음의 여정을 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러 부류로 나눕니다.
“싸워라 이겨라” 라는 정치적인 운동이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열심당입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해방을 이루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12제자 중 시몬이 열심당원입니다.
이들은 로마로부터 벗어나고 독립을 이루는 것과 로마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반대한 자들입니다.
과격파 유대인입니다.
B.C 164년 마카비
Maccabeus)가 안티구스
4세에 의해서 더렵혀진 성전을 되찾고 혁명을 성공합니다.
당시 마카비는 ‘메시아’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후
4년 뒤
B.C. 160년경 전사하게 됩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이것을 기념하는 수전절(Hanukkaha)이라는 빛의 축제(The
Festival of lights)를
12월 한 달 동안 합니다.
또한 이와는 정 반대로 헤롯당이라고 부르는 자들입니다.
‘타협하자’라고 하는 정치적으로 친 로마파들입니다.
이들은 로마에 붙어서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떠나자”라는 부류입니다.
그래서 기도원이나 산으로 들어가서 우리들 끼리 하나님 나라를 이루자는 생각입니다.
곧 경건 생활을 엄격하게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에세네파
Essenes’라는 ‘경건주의자’입니다.
근세의 수도원 생활과 비슷합니다.
독신 생활,
고립, 의식이 있는 생활,
금욕생활을 좋아합니다.
세례요한이 여기에 속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 자’입니다.
메시아가 언제든지 오실 것이지만,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어!
그래서 “그냥 세상 속에서 즐기면서 살 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때 회개하고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입니다. 나머지 한 부류는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변혁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경건하게 말씀을 붙잡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세상 속에서 세상과 부대끼며 살았습니다.
이들은 누가복음
1-2장과 복음서에 나타난 사람들입니다.
요한의 부모인 스가랴와 엘리사벳,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그리고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시므온과 안나이지요.
그 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신앙과 삶을 통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성령이 주시는 안목으로 살아갑니다.
먼저 시므온에 대하여는 27절에서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고 합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 했습니다.
‘의롭다’란 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예배를 잘 드리면서 말씀대로 살려고 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경건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잘 섬기며 수직 수평관계를 잘 했다는 뜻이지요.
야고보가 경건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Religion
that God our Father accepts as pure and faultless is this: to look after
orphans and widows in their distress and to keep oneself from being polluted by
the world. 시므온은 나이 많은 할아버지이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고아와 과부를 섬기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정치적인 권력으로부터 힘을 받거나 오직 자신만의 경건으로 힘을 얻지만 언제나 그의 삶의 원동력과 힘은 하나님으로 부터 받고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만 강조하거나 사람들과의 관계만 치우치는 것은 균형 잡힌 신앙생활이 아닌 거죠.
동전과 화폐는 한 면만 가지만 위조가 됩니다.
또한
25,26,27절은 시므온을 이렇게 소개하죠 “성령이 그 위에서 계시더라(25)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라(26)
성령의 감동으로
(27)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한 문장으로 정의 한다면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성령과 함께 살았다” 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성령이 그 위에 있고 성령의 지시를 받고,
성령의 감동으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 셩령의 인도로 살다보니,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아이로 오신 예수님을 안고 오는 마리아와 요셉을 보면서 한 눈에 그가 메시아이심을 알아봅니다.
할례를 받으러 오는 예수님을 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 하실 자로 고백합니다.
주님이여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바라봅니다.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2:30-32) For my eyes have seen your salvation, which you have prepared in the
sight of all people, a light for revelation to the Gentiles and for glory to
your people Israel." 영적인 안목이 생긴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약한 아이로 보지만 그는 만민이 예수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자로 찬송합니다.
그리고 처음 보는 마리아 에게는 “칼이 너를 찌를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2:34-35)
"This child is destined to cause the falling and rising of many in Israel,
and to be a sign that will be spoken against, so that the thoughts of many hearts will be revealed. And
a sword will pierce your own soul too." 아니 이런 막말이 어디 있습니까?
요즘 우리말로는 ‘아무 말 대 잔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자기도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하는 말로서 의미가 없는 갓을 뜻하는데 과연 시므온이 하는 이 말이 그런 말입니까?
아닙니다.
시므온은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예수님이 아기로 오신 것을 축하하는 것으로부터 이 예수가 장차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안목은 어떻게 가질 수 있나요?
영적인 안목,
영안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중심으로 살아가려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알고 경험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봅니까?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소외된 나를 위해서 이미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이심을 알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중심으로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 은혜를 은혜로 알고 받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반면 모든 것을 내가 한 것으로 교만 하게 사는 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영적인 안목으로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안목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바로 시므온이고 그리스도인입니다.
2.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위로하고 치유하며 생활합니다.
안나에 대하여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섬겼다” 고합니다.
(36) 누가는 안나를 자세히 소개합니다.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이고 선지자이고 결혼을 했는데 남편과
7년을 살다가 과부가 되었습니다.
과부 경력이
84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15세 전후 경혼 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녀의 나이를 계산 해 보니 대강 그녀의 나이가
105-110세입니다. 인간적으로 안 된 사람입니다.
그녀의 삶은 한 마디로 파란 만장했습니다.
뿐 아니라,
온전한 나라가 아니고,
로마의 식민지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경건하게 살지 않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선지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분명 쉽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그녀가 ‘자서전’을 쓴다면 얼마나 할 말이 많겠습니까?
그녀는 반항,
원망, 불평, 자신의 탓으로 돌리거나 방어적인 삶을 살다가 불행을 전수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지만 그는 자신에게 닥친 슬픔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이해하고 더 성숙한 여인으로 살아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녀에게 주시는 위로가 다른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싸매고 위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냐고요?
누가는 그녀가 단지 ‘과부 안나’가 아니라 ‘선지자 안나’로 소개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밤낮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천국을 소망하고 성도들에게 본이 되고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디 상처 아픔이 없는 사람이 있나요?
대부분은 자신에게 있는 충분치 않은 물질,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를 가지고 자신을 묘사 합니다.
안나가 성전에 있었다는 말은 지리적으로 집에 성전에 가까웠다는 말이 아니라 늘 그의 마음은 성전에 있었고 성전에 찾아오는 여인들의 친구가 되고 상담가가 되고 위로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과 늘 교제하는 삶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 받고 살아간다면 이것이 곧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하면 남을 탓하거나 부러워할 시간이 없겠지요.
성도는 시대의 문제와 사람들의 필요를 돌아보고 예수님의 구속과 은혜를 살다보면,
절망과 방종의 길에,
과거의 아픔에서 돌아서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과부 안나로 살 것인가
? 선지자 안나로 살 것인가
? 여러분!
주님과 딱 붙어 있으면 더 강하여집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더 이상 세상 부러울 것 없고 해탈하여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만나고 시므온이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십니다.” 고 고백하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가득 차게 되어다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주님 부르시면 갈 수 있었지만 이제까지 살게 하신 것은 메시아를 만나는 은혜를 주시고 그런 사람들과 은혜를 나누고 영향을 흘러 보내게 하신 것이구나!
라고 감사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마지막을 함께 할 사람들을 온라인으로 만나서 세상을 떠나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 입니까?
그러나 종종 이런 종류 아픔에서 벗어나 자신의 아픔을 바탕으로 다른 아픈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종종 봅니다.
우리는 다 아픕니다.
치유 받은 상처자로서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며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어깨를 빌려주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024년 서로에게 시간과 물질을 내어주고 집을 내어주고 먹을 것을 나누고 따스한 말 한마디로 힘으로 주고 소그룹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열어준 것에 목사로서 감사를 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힘을 얻고 위로를 바도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제게 말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성령으로 우리와 지금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정치적인 세력이나 세상의 위로를 받거나 체념하면서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의 위로 성령의 감동으로 주님께 딱 붙어서 영적인 안목으로 살고 그의 은혜를 경험하고 위로를 받고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위로하고 이해하는 여러분이 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다가 주님의 품에 안겨서 기쁨을 노래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라는’ 찬송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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