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예수 12/8/2024 | 김혁 | 2025-01-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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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2:1-7절 개역개정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역사 속의 예수 눅 2:1-7 12월을 성탄의 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절기로는 ‘대강절’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성탄절의 추억이 있습니까?
교회에서 성극을 해서 요셉 마리아의 역을 맡았던 분들,
축하 발표회 마치고 옹기종기 모여서 게임하고 선물주고 받았든 일들,
어떤 분들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하는 분들 그리고 경찰서나 파출소 그리고 교도소 에가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 ’ 라고 목청껏 불렀든 분들 등
.... 저는 중 고등부 때에 집집마다 돌면서 새벽 송을 불렀든 기억이 있습니다.
한 집을 마치고 간식을 잔뜩 들고 다음 집으로 가는 데 공동묘지를 넘어 가든 기억은 입가에 웃음을 짓곤 합니다.
좋은 추억은 사람의 마음을 뛰게 합니다.
이런 영적인 추억들이 우리를 설레게 하기도 합니다.
신앙은 ‘생활’입니다.
당신의 신앙은 어때?
라고 질문하면 결국의 나의 삶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경험들입니다.
‘결과’보다 ‘과정’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미 결과이고,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는 과정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지요?
과정을 살피다 보면 우리가 잘 알지 못했든 하나님의 섭리와 예수님의 오심에 관여했든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더 은혜가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사는 마태와 누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서 누가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이 재미있는 연극이나 이야기의 소재가 아니라 실제 일어났든 역사로서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잠간 마태의 기록과 누가의 기록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수신자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누가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기록 합니다. 마태는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소개한다면 누가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에 대하여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축하사절단을 동방의 박사를 소개합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왕으로 기대하고 있었기에 마태복음을 읽는 유대인들에게는 더 깊이 마음으로 다가 갈 수 있었습니다.
누가는 들에서 일을 마친 평범한 목자들로 기록합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하나님은 정말로 세밀하시죠.
우리 개개인에게도 세밀하게 인도 보호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누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의도는 무엇일까 생각 해 봅시다.
. 세상의 역사 속으로 역사는 실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두 사람의 왕,
지도자가 나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와 ‘구레뇨’입니다.
이 사람은 실제 인물입니다.(1-2)
이들은 실제 로마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시대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어낸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 수 있지요.
‘구레뇨’는 수리아 지역을 다르셨습니다.
‘아구스도’는 주전
30년에 로마의 최고 사령관(Imperator)과 로마 원로원의 수장(Princeps)이 됩니다.
그리고 원로회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받는다.
'숭고한자', '고위한자' 의 뜻입니다.
마태는 그 시대가 ‘헤롯의 시대’라고 합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
Caesar 주전
27~주후
14년)가 헤롯 왕에게 가이사랴 지역을 하사했고 헤롯 왕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 대한 감사 표시로 항구와 도시를 건설하고 이 항구도시의 이름을 가이사랴(Caesarea)라고 불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초대 황제로 로마에 평화의시대를 가져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모든 권력을 가지려 했고 완전한 독재자입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찍 소리’도 못했습니다.
본문은 당시 ‘인구조사’를 배경으로 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기록합니다.
인구조사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지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이벤트입니다.
귀족부터 아주 가난한 자들까지도 아무리 멀어도 고향까지 불평 한마디 못하고 가야만 헸습니다.
자신의 통치 능력이 얼마나 탁월 하고 로마제국의 강력함을 나타내주는 지표로 시용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 와야 한다는 점에서 인구조사는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넓은 지역을 조사한다는 것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당시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인구조사가 주전
6년경에 명령했지만 주전
3-4년경 헤롯의 죽기
1-2년 정도에 시작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구조사가 실제의 역사라고 증명을 합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시기를 선택하지 않으시고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돈하고 신음하는 소리가 넘치는 시기를 선택 하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메시아가 오셔야 하는 시기 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하여 어떤 신비스러운 방법을 택하지 않고 인간의 역사를 이용하여,
이것은 미가서
5:2을 정확하게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우구스 황제’와 ‘구레네’의 인구조사를 사용하셔서 ‘성경’의 ‘미가’가 예언을 이루 신 것입니다.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But you, Bethlehem Ephrathah, though you are small
among the clans of Judah, out of you will come for me one who will be ruler
over Israel, whose origins are from of old, from ancient times. " 마리아는 갈릴지 지방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만삭된 마리아가 베들레헴까지 가야했습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120㎞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아도,
만삭이 된 임산부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이런 여행은 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이 일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누가 만삭된 마리아에게 베들레헴까지 가서 아이를 낳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로마의 역사를 섭리하심으로 이 일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로마의 황제로 하여금 제국 내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인구조사로 호적 할 것을 명하게 하심으로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역사를 섭리하시고 환경을 조성하신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다른 본문을 봅시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지팡이)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민수기24:17) "I see him, but not now; I behold him, but not near.
A star will come out of Jacob; a scepter will rise out of Israel. He
will crush the foreheads of Moab, the skulls of all the sons of Sheth.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11:1) A
shoot will come up from the stump of Jesse; from his roots a Branch will bear
fruit. 우리의 지금
or 현재가 역시 하나님의 섭리로 되어졌음을 우리도 고백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인간의 역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은 결코 환영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오심의 절정의 순간은 이 땅에 아기로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다음 구절을 통하여 예언 되어 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Therefore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a sign: The
virgin will be with child and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이것은 구약 성경 이사야
7장14절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가족 친지들이 있는 따스한 집이 아닌 낮선 땅 그것도 가장 낮은 곳의 상징인 ‘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이러한 성경의 예언을 점차로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오시게 하기 위하여 이 젊은 가정의 생각과 행동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관이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윗 자손의 임산부를 보고도 방을 양보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외면되어진 출산입니다.
마리아에게는 구유 밖에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왔는데 누울 곳이 없습니다.
문전 박대로 소외 되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추석과 같이 정말 오랜만에 만난 가족 친지들로 떠들썩 한 그 밤에,
이름 모를 한 쪽 소외된 작은 마구간에서,
아이의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든 것이죠.
사람들에게 잊힌 출산이었고,
사람들은 그들이 배척한 그 아기가 메시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밤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7절의 말씀은 마리아와 요셉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And she gave birth to her firstborn son; and she wrapped Him in cloths, and
laid Him in a manger, 마리아는 약
10개월 전 천사의 방문으로 예수의 잉태 소식을 듣습니다.
누가복음
1:35입니다.
“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The Holy Spirit will come upon you, and the power of the Most High will
overshadow you; and for that reason the holy Child shall be called the Son of
God. 그리고 그녀는 주의 말씀대로 이루러 지기를 원합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요셉도 마찬 가가지입니다.
약혼한 여자 마리아의 임신은 혼란 자체였습니다.
조용히 해결하려는 요셉에게 주의 사자가 꿈에서 말합니다.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그는 성령의 잉태되었고 그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합니다.
예수의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 할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메시아’입니다. 주의 사자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천사의 방문을 받고 꿈에서 깨어나 아내 마리아를 데려옵니다.
이랬든 아들이 자신들의 눈앞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옆에 있는 천을 가져다가 둘둘 말아서 구유에 누인 것이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마리아와 요셉에게는 영광스로운 순간입니다. 상식적으로 구세주로,
구원자로 오시는 하나님이 좀 거창하게 화려하게 오셔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은 그저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그들의 손으로 안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그 순간은 실로 감격의 순간이 이었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 16:21) A woman giving birth to a child has pain because her time
has come; but when her baby is born she forgets the anguish because of her joy
that a child is born into the world.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 아들 예수는 가장 비천한 곳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메시아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품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역사이고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빌립보서
2:5-7)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Who, being in very nature God,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grasped, but made himself nothing, taking the very nature of a servant,
being made in human likeness. 내 안으로 오신 예수의 생명이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까?
아무도 모르지만 그분이 나의 구세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 내가 알았든 것입니다.
내안에 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오심은 조용히 그리고 강하고 분명하게 역사 속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우리 안에 혁명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세상은 예수님의 오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는 성탄 축하메시지에서 "주님 모습을 닮아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고 존중하려고 노력할 때 화합과 소통,
통합과 공존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도 성탄 메시지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다양한 이웃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나가자". "예수님 탄신을 모든 불자들과 더불어 찬탄하며 희생으로 이루고자하신 평화와 행복의 삶을 모든 이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
-연합뉴스 세상은 예수가 진짜로 하나님이신지 그가 역사 속에서 실존했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립 서비스’를 하거나 ‘정신’을 강조합니다.
즉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신화속의 예수님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실재한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계획하시고 이루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의 역사 속에 오셔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의 구세주가 되신 것처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우리가 사는 이 곳에서,
우리들은 작은 예수로서 다른 사람들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대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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