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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을 뛰어넘어 전파되는 복음 10/13/2024 류예준 20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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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빌립보서1:12-18절 개역개정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예상을 뛰어넘어 전파되는 복음

Introduction:  2 우리는 허리케인 헐린을 겼었습니다. 허리케인 헐린은 우리 그린빌을 강타하여서 많은 곳을 마비시켰습니다. 나무가 쓰러지면서 전선줄은 끊어졌고 전기도 끊어지면서 음식을 해먹을 없었습니다. 가스 버너를 사려고 해도 일찍이 상점들마다 사람들이 소위 싹쓸이를 해버리는 바람에 근방에서는 가스 버너를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렇게 심각한 허리케인을 그린빌에서 겪은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허리케인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라는 것이죠. 만약에 허리케인 헐린이 정도로 강력할 것이라고 알았다면 달랐을까요? 그랬다면 미리 전기 발전기도 구해놓고 가스버너도 넉넉히 준비해놓고 음식도 냉동 음식은 빼놓았을 겁니다. 만약에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지만 우리가 허리케인의 피해의 정도를 예상하고 우리 삶에서 필요한 것들을 갖춰놓고 준비했다면 어려움을 이겨내는게 수월했을 겁니다.

우리의 예상은 허리케인 헐린이 온다고 하면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정도에서의 허리케인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허리케인 헐린 이전에 가장 최근에 왔던 허리케인이 무엇인지 기억나십니까? 저도 이름은 모르지만 허리케인이 어느 정도 피해를 주었는지는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절대 이번에 비할 것은 아니었고 그랬기에 허리케인 헐린이라고 해서 특별할까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문제는 허리케인 헐린이 이정도 피해를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예상 밖이었는데 우리는 허리케인 헐린을 우리의 예상 안에서만 예측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상 또는 예측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은 오류가 있습니다. 예상을 뛰어 넘는 상황이 닥쳤을 우리의 모습을 보면 오류를 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을 있을까? 모든 예상을 우리는 없는데 그렇다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고 예상은 끝이 없는데요. 이러한 딜레마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보일 있습니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겪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랜 기간 내가 보아온 것에 내가 믿어온 것에 내가 맞다고 생각해 우리의 예상에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을 제한시킵니다. FCF: 우리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한 신실함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에도 신실하게 그리스도 복음을 전할 있을까 라는 질문에 사도 바울은 그의 옥중서신 하나인 빌립보서 1장에서 답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한탄 대신 사도 바울은

주제: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기에 우리는 언제나 신실하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가 그가 당한 모든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 되었다 라는 사실을 알기 원했습니다어떠한 상황에도 복음은 진전하고 있다는 사실에 힘입어 우리가 예상치 못한 상황과 예상치 못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신실하도록 서로를 격려해야 합니다.

                        I.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기에 우리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주어져도 신실하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vv. 12-14)

사람마다 복음의 전파되는 것에 대한 기대는 다릅니다. 바울은 그가 처한 상황이 편지를 받는 이들이 기대했던 바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택에 구금되어서 로마 군인들의 감시 속에 있는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기대했던 성공적인 선교 사역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락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예상치 못한 상황을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바꾸셨고 사용하셨는지 말해줍니다.

[Subpoint 1] 어떻게 우리가 보기에는 절망적인 상황이 도리어 복음의 전파가 될까요? 하나님께서 바꾸시면 됩니다.

사도 바울이 감금되고 있는 모습은 사도 바울의 생애를 이미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다지 낯선 모습이 아닙니다. 하지만 빌립보 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수감생활을 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은 이것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번째 전도여행에서 빌립보에 방문해서 곳에 교회를 세우고 그들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놀라운 복음의 사역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대단한 사람 또는 수감되어서 저렇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라고 쉽게 생각되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감옥에 있다 라는 소식은 한동안 바울의 소식을 몰랐던 빌립보 교인들에겐 놀랄 일이고 낙담이 되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사정을 전해 들은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그의 소식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 말하기를, 그가 현재 감옥에 수감되어 겪고 있는 고난의 모습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겪고 있는 고난 자체가 복음의 진전으로 바뀌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의 수감 생활이 그의 복음 전파 사역에 제동을 거는 것으로 보여지고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예상치 못한 상황을 그가 뜻하신 복음의 전파되는 통로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습은 바로 이어지는 13절에서 명확하게 보여집니다. 13절에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매임 바울은 비교적 자유가 있다는 자택에 감금되었다고는 하나 그의 손목에는 여전히 쇠고랑이 차여 있는 속박된 처지였습니다. 그런 그가 속박된 상황이 로마 시위대 또는 근위병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으로 놀랍게 사용되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감시하면서 그와 이야기도 나누었을 로마 시위대 그리고 근위병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방인 사역은 감옥에서 조차도 계속된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예상치 못했던 상황은 복음의 전파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Transition: 바뀌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수감 생활은 복음 전파의 장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수감 생활은 믿지 않던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에서 나아가 믿는 자들로 하여금 바울의 수감 생활을 통해서 담대함을 얻게 했습니다.

[Subpoint 2] 어떻게 우리가 보기에는 절망 되는 상황에도 복음에 대해 담대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상황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때는 절망스러운 상황을 사용하시면 우리는 담대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복음을 전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4절에서 이번에는 그가 처한 상황이 믿는 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형제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안에서 신뢰함으로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바울이 수감되었는 소식이 어떤 이들에게는 낙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수감 중에서도 멈추지 않는 복음 전파의 놀라운 소식이 용기를 주었습니다. 바울의 수감 소식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변함없이 신실하게 하였습니다. 나아가서 신실함을 토대로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전하게 하였습니다. 믿는 이들이 바울의 수감 소식에도 불구하고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였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이 바울의 핍박 소식을 듣고 두려움을 갖거나 바울에 대한 기대가 떨어지면서 복음 전파에서 멀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믿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움츠러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담대히 전하도록 사용하십니다.

Application: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기에, 우리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을 전파하는데 신실해야 합니다. 말은 하나님께서 복음의 전파를 위한 목적 달성을 위해서 우리가 뜻밖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도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지금 고난을 주시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나는 열심히 교회도 매주 나가고, 설교도 열심히 듣고, 십일조는 꾸준히 하고 있는데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주어졌는지 반문하고 있을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나의 열심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특히 아무도 내가 겪고 있는 것을 이해해 없다는 기분이 그렇습니다. 뭐하러 소그룹에서 분위기나 망치게 이런걸 나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나요? 우울함과 비통함 속에 혼자 갇혀 있지 말고 믿음의 동반자들이 있는 장소로 나아가야 합니다. 슬픔과 어려움을 소그룹원들에게 나누세요. 매주 금요일 금요기도회에서 그런 기도제목들을 나누세요.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말로나 그러지 기도하겠어? 하는 생각에 나의 어려움들을 나누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 공동체로서 함께 문제를 하나님 앞에 맡겨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분이 모든 상황의 주관자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함께 문제를 놓고 기도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며 일하심은 내가 처한 문제의 해결만이 아니라 기도를 놓고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서로를 세우고 은혜교회를 하나되게 것입니다. 기도 제목을 나누고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중보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믿지 않던 어떤 이가 하나님 앞에 나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Illustration: 민망한 이야기이지만 예전에 금요기도회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친구가 너무나 멋있게 기도회에서 말할 없는기도제목이 있다고 말할 없는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해 달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도제목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도 생기고 뭔가 구구절절 말하는 기도제목들과는 달라 보여서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바로 후에 금요기도회에서 당당하게 말할 없는 기도제목이 있으니 기도해 달라고 모두 앞에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주에 저의 철없는 기도제목을 듣고 정말 열심으로 기도해주셨던 집사님께서 봉투를 건네시면서 많이 어려운 같은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정말 노력을 다해서 받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제가 당황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기도제목 제대로 내야 되야겠다라고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기도제목 가지고 장난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저의 경험에서 가지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기도의 자리에 있는 분들이 여러분의 기도 제목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신다는 겁니다. 기도를 절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지 마시고 이러한 기도로 예상치 못한 상황을 복음의 진전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Transition: 예상치 못한 상황이 있었다면 예상치 못한 반응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한국이 점점 제조업에서 약세를 보인다는 것에 걱정의 소리가 커질 어떤 사람들은 이를 도리어 긍정적으로 봅니다. 마진이 적은 제조업보다 마진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 강세를 보이는 것에 집중하고 제조업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동일한 상황을 놓고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전파라는 동일한 목표를 두고도 상반된 반응이 보일 있는 것입니다.

Transition:  같은 복음을 전파하는 우리 모두이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하지요. 복음의 전파되는 모습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달랐다고 아까 했다면 이번에는 복음의 전파에 대한 동기에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II.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기에 우리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도 신실하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15절에서부터17 문단에서 복음의 전파를 가지 다른 동기로서 행하는 부류의 믿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Subpoint 1] 복음 전파를 하는 있어서 다른 동기를 가진 부류의 사람들은 누구인가?

투기와 분쟁으로 전하는 사람과 착한 뜻과 사랑으로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15절에서 투기와 분쟁이라는 동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이들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동기를 17절에서 세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투기와 분쟁이라는 단어에서 분쟁이라는 단어를 rivalry 해석하는 영어 성경들이 있습니다. 분쟁이 질투심에서 비롯된 경쟁심이었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 이러한 경쟁심에서 비롯된 동기를 바울은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줄로 생각하여라고 하면서 그들의 경쟁심이 바울 자신을 향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수감 생활을 하게 것이 용기를 주어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바울이 수감된 것을 그의 실패로 여기고 더욱 그가 로마 법정에서 어려움을 겪어서 사도로서 나서지 못하게 되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을 대적하는 무리들은 존재했습니다. 할례냐 무할례냐에 대한 논쟁에서 바울의 대답에 따른 그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의 부족한 언변에 그의 자질을 반문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투기와 분쟁으로 하는 이들이 누구를 가리켜서 하는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바울이 이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5절에 착한 16절에 바울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알고 사랑으로전한 이들은 바울의 수감 소식을 들었을 상황이 하나님께서 바울을 세우셔서 복음을 지키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수한 동기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조차도 바울의 초점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초점은 반대되는 복음 전파자들을 대조함에 있지 않습니다.

[Subpoint 2] 그렇다면 바울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입니다.

18절에서 그러면 무엇이냐바울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가지를 이제 말합니다.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앞서 15절에서부터  17절에서 다른 동기를 가진 사람들도 바울은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다시 15절을 보아도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그리고 17절에 투기와 분쟁으로 하는 이들을 가리켜서도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순수한 동기에서 말씀을 전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잘못된 동기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이들. 질투심과 경쟁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도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심각한 신학적 오류를 범한다거나 잘못된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철저히 그들의 잘못된 동기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실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순수한 의도가 아닌 저런 더럽혀진 의도를 지닌 이들의 입술을 통해서 가장 순수한 복음이 전파될 있습니까? 모순이라고 보여지는 현상에 답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 분을 통한 복음의 전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 하나입니다.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라고 말한 바울은 그것으로 그는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어서 옳지 못한 동기를 지닌 이들이 자신을 공격하여도 그것에는 상관 않고 그럼에도 그리스도가 전파되었다 라는 바울의 선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Illustration: 1796 9 8일에 뉴튼이 그가 전도했던 한나 모어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모어는 잉글랜드 멘딥이라는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역하면서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뉴튼이 그녀에게 편지에는 이렇게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에게 어떤 것이기에 당신의 모든 시간, 재능, 그리고 영향력을 모두 봉사하는데 바치게 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이 속한 곳에 주신 성공과 격려도 궁금하지 않을 없습니다.” 뉴튼의 편지에 모어는 겸손하게 이렇게 답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가장 가망이 없고 장래가 없는 도구를 사용해서 일하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나는 분이 스스로 하신 것이라는 사실에 어떠한 의심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언제나 나로 하여금 위대한 작가가 아주 좋은 펜으로 집필하고 있는 같은 생각이 들게 합니다.” 한나 모어는 위대한 작가 하나님께서 좋은 도구에 불과한 자신을 사용하셔서 분의 위대한 일을 이루어가신다는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펜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어쩌면 아주 좋은 펜일지도요. 그렇지만 펜을 써서 위대한 이야기를 써내려 가고 계신 분이 바로 우리의 위대한 작가이신 하나님이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Application: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기에, 우리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도 복음을 전파하는데 신실해야 합니다. 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한가지만을 우리가 신실하게 바라볼 어떤 변질된 동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복음 전파에 흔들리지 않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울림이 있을 수밖에 없는 말씀이 아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도 필요한 말씀입니다. 지도자 뿐만 아니라 모두가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들의 동기가 과연 복음 전파에 신실함을 보여주는지 다시 말해 나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전파에 유익이 되는지 해를 끼치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옆에 앞에 뒤에 있는 누구든 조금이라도 질투함이 있지 않으십니까?   사람이 내놓은 기도제목에서 저런 기도제목으로 내놓지 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교회에서 보여지는 열심이 조금 내가 다른 이들 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경쟁심에서 비롯되지는 않았나요? 돌아봐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 안의 분쟁이 밖으로 표출되어서 다른 누군가를 실족 시킬 있다 라는 것에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감출 있을 모르겠지만 우리 힘으로 질투심을 그리고 경쟁심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만해보려 질투하고 경쟁하려는 동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의 의지력을 하나님께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것보다 크게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면 지금 그만해야 합니다. 어느새 자리잡은 우리 안의 같은 마음은 매우 위험하지만 이것들을 오늘 당장 주님 앞에 고백하시고 회개함으로 매번 그렇듯 아닌 척하면서 자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 이렇게 부족하고 보잘 없는 내가 오로지 그리스도에 입어서 자리에 있었구나 라는 감격으로 나오려고 우리 다같이 힘써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했을 누가 부족한 것이 티가 나고 내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을 누군가 보여도 조금 이해해 있고 그런 부분들을 정죄함으로 갈라지는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 권면하고 감싸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교회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교회가 우리 은혜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Conclusion: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전파됨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함으로 모든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상황의 바뀜과 상반된 반응 사이에서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놀라운 역사에 우리가 참여할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복음 전파의 사명에 우리가 신실하도록 예상치 못한 상황을 복음 전파의 장으로 바꾸시고 자칫 갈라질 있는 다른 동기에서 비롯된 복음의 전파자들 사이에서도 그리스도가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효율적 이타주의라는 개념이 대세를 이루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론에 따르면 감정적으로 치우쳐져서 기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성적인 판단으로 기부를 효율적으로 그러니까 정말 필요한 곳에 기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이 나오게 바탕에는 기부 단체들이 제대로 기부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불신이 있습니다.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은 자신이 누릴 있는 행복을 누리는 선에서 있는 최선의 금액을 가장 효율적인 통계를 가진 구호단체에게 기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은 얼핏 듣기에는 맞는 같지만 문제가 있는데 바로 숫자로만 표현되지 않는 간절한 기부의 필요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암환자10명을 살릴 있는 비용이 희귀병에 걸린 사람 밖에 살릴 없다고 한다면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은 비효율적인 것이라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만 나는 희귀병에 걸린 사람을 살리겠다고 하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있을까요?

우리도 복음의 전파를 그렇게 효율성을 따지며 바라보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분투한 노력이 효율성이라는 잣대에 의해서 평가받는다면 굉장히 무의미해 보일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고난을 겪으면서 이것이 복음의 전파의 장이 되었다고 기뻐하고 무수히 많은 교파간 교회간 교인들간의 사소한 다툼 속에서도 그리스도가 전파되었다고 기뻐하는 모습은 효율성을 말하는 이들에게는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고 이해할 없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잣대가 아닌 하나님이 일하심을 보았을 우리로서는 이해할 없는 복음 그리스도가 전파됨을 비로소 보고 진리를 위해 우리의 일생 동안 힘쓸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다시 한번 빌립보서 1 18 말씀을 읽어드리면서 마치길 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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