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정과 유기 | 김정호 | 2024-07-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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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정과 유기(Election and Reprobation)
서론: 지금도 매일 예측할 수 없는 사건, 사고가 우연하게 발생합니다. 과연 세상 만사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그가 만드신 만물에 대한 그의 권세와 다스림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와 영원한 계획을 따라 만사를 작정하십니다. 그가 작정하신 일들은 반드시 그가 정하신 때에 일어납니다. I. 예정(Predestination): 여행을 떠날 때는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운명”(destiny)은 우리에게 마지막 목적지가 있음을 뜻합니다. 영어의 “pre”라는 접두사는 “앞서, 미리”를 뜻합니다. 예정은 미리 정한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의 마지막 목적지를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바울이 위 본문에서 예정과 택정에 대하여 논할 때 그는 그것을 축복으로 서술합니다. 예정과 택정 교리는 부정적인 것이 전혀 아닙니다. 논란이나 비난의 대상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복됨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예정이나 택정을 생각할 때는 감사와 찬송이 올바른 반응입니다. 예정과 택정 교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긍휼에 대하여 보여줍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신비스러운 은혜를 알려줍니다. 우리가 이러한 점을 망각하면 예정과 택정 교리는 이해할 수 없는 논쟁 거리로 전락할 것입니다. 요한 칼빈은 예정 교리는 신비스러운 것이기에 주의하고 겸손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의 경고를 무시하기에 예정 교리를 왜곡하여 하나님의 정직하심을 공격하는 우를 범합니다. 하나님의 예정 교리를 연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은혜와 자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예정 교리는 단순히 칼빈, 루터, 어거스틴이 만들어낸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바울이 가르친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을 인간의 이성이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이 될 자들을 택정, 예정하여 주셨습니다. 이 진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속합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후에 이 가르침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찬송하게 됩니다.
II. 예지에 대한 견해(The view of prescience): 예지관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또는 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사전 지식에 달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시간의 복도를 내려다보시며 누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누가 거부할지 보셨고, 그 사전 지식에 근거하여 올바른 선택을 할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입양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서 최종 분석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선택할 것이라는 지식에 근거하여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예정 교리가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선택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합니다. 또한 성경은 예정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근거한다고 가르칩니다(엡 1:5). 선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하나님의 결정과 선택은 그분의 기쁘신 뜻에 따른 것입니다.
III. 하나님의 자비(God’s mercy):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선택 교리를 좀더 자세하게 다룹니다: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0-13).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에서가 아닌 야곱을 구속하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태어나기 전,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이미 언약의 후손으로 야곱을 정하셨고 에서에게는 그러한 은혜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 불의한 것이 아니냐고 따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평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이런 말씀을 선포합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하나님께서는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들이 자신을 반역하며 살아가는 것을 고려하실 때, 어떤 이들에게는 자비를 베풀고 어떤 이들에게는 공의를 베푸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에서는 정의를 받았고 야곱은 은혜를 받았으며 둘 다 불의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무고한 사람을 벌하지 않으시지만 죄 지은 사람을 구속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속하지 않으시며, 구속할 의무도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분이 일부를 구속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택정은 우리의 노력, 행동, 선택, 의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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